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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가득한 집]
마음필사, 내 마음을 붙든 한 문단 - 임경선

1.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사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나의 미래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꿈을 꾸지않게 되었다. 그대신 내가 해낼 수 있는 노력과 누릴 수 있는 노력의 최대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혜안이 생겼다. 달리 말하자면 현실과 자기자신을 직시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인생의 다양한 기쁨과 행복도 어느 정도 경험해봤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두고봤을 때, 나 역시도 한 사람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일이 그 어떤 물질적 풍요로움이나 지적 충만감보다 크고 깊은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면서 사는 순간이 살아숨쉬는 감각을 선사하며, 벅차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에 깨어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늘 하는 얘기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사랑해야만 한다.

요즘은 사랑의 기쁨보다 상처의 아픔을 호소하며 사랑을 시작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애가 타고 마음이 닳을지언정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 같은 사랑에 항복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건 인생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살아 있을 때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처럼 멋진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사랑에 이상을 품지 않으면 세상살이 중 그 어떤 것에 우리가 이상을 품을 수 있을까. 시큰시큰한 사랑의 열병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소설, [단순한 열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 문단은 대체불가능한 사랑의 절대적 가치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명 문단이다.


2.

“내가 바라는 건 그냥 투정을 마음껏 부리는 거야. 완벽한 투정. 이를테면 지금 내가 너한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 그러면 넌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헉헉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하고 내밀어. 그러면 내가 ‘흥, 이제 이딴 건 먹고 싶지도 않아.’라며 그것을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려.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거야.”
“그건 사랑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난 좀 어이가 없었다.
“있다니까. 네가 잘 모를 뿐이야. 여자한테는 그런 게 무지무지 소중할 때가 있거든.”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여자주인공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들에겐 저마다의 슬픔과 결핍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소설<노르웨이의 숲>에는 ‘나오코’와 ‘미도리’라는 두 명의 여자주인공이 있다. ‘나오코’가 깊고 정적을 품은, 지켜주고 싶은 여자인 반면, ‘미도리’는 기대고 싶어지는 여름햇살 같은 여자다. 툭 건드리면 당장 바스라질 것 같은 나오코와는 반대로 미도리는 생명력과 자유분방함이 넘친다. 연애에 있어서도 씩씩해서, 좋으면 좋다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다.

그러한 ‘강한 여자’ 미도리가 왠일로,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인 ‘와타나베’에게 이런 어리광섞인 속내를 드러낸다. 전혀 미도리답지 않은 이야기에 ‘와타나베’는 당황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알고 있다. 미도리가 변덕스러운 폭군을 꿈꾸는 이유는 과거 그녀가 아무한테도 어리광을 부려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니, 도리어 상대의 기분대로 케이크를 계속 갖다바쳐야했던 것은 늘 ‘애어른’이어야만 했던 미도리의 역할이었다. 어리광 한 번 부려보지 못하고 일찌기 자립해야했던 미도리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내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 투정을 부려도 그것을 다 묵묵히 받아주는 것.’그 마음 난 너무 알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넌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 여자야’라는 서운한 소리를 숱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강해보여도,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알아주길 바랬던 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글/임경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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