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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성실한 작가생활>#3

초고가 뭐길래

책을 쓰는 일련의 과정 중 내가 가장 즐거울 때는 첫째, 얼개를 잡고 초고를 내키는 대로 써나갈 때이고 둘째는 교정지 상태로 처음 원고를 볼 때, 마지막으로는 책 제목을 고민할 때이다. 얼마전 나는 그 첫번째 즐거움인 ‘초고 쓰기’를 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초고’란 출판사에게 보내는 첫 정식원고로서의 초고가 아닌, 완성도와 상관없이 어쨌거나 책 한 권 분량을 채워놓은 글 뭉치라는 의미의 초고다. 처음 쭉쭉쭉 술술술 써나가는 원고 말이다.

본 연재칼럼 제목에 뻔뻔하게 들어간 ‘성실한’이라는 개념은 사실 나의 급한 성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타고난 조급증은 삶의 태도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새 책을 준비할 때는 우선 초고를 빨리 쓰고 싶어 나는 안달이 나있다. 구상부터 치밀하게 하거나 느긋하게 꾹꾹 연필심 눌러가며 심사숙고 한줄 한줄 써보자고 마음먹어도 막상 발동이 걸리면 어떻게든 A4 100장이라는 단행본 기본분량을 채우지 못해 스스로를 닥달한다. 어떤 형태로든 다음 책이 나올 거라는 확실한 감촉을 가능한 한 빨리 느껴야 안심하는 불안증인 것이다. 마치 만난지 얼마 안 된 상대에게 ‘너에게 난 어떤 존재냐’고 다그치는 연애하수처럼.

어서 빨리 A4 100 장을 채워야 할 것 같은 쫓기는 기분이 들어도, 그럼에도불구하고 앞서 말했듯이 이 단계는 책쓰기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행복한 단계다. 백지에 예쁜 한글폰트 글자들을 채워나가는 일은 흥분되는 일이다. 감정이 흐르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자유롭고 충동적인 자신을 제어하지 않는 일은 무척 기분좋은 일이다. 허나 쾌감은 잠시, 이내 끈끈한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방학은 끝나고 이젠 헐렁하게 채워놓은 내용을 확 조여줄 차례. 그 첫 A4 100장을 종이로 출력해서 제본을 한 후, 원고에 펜으로 수정보완을 한다. 컴퓨터 화면으로 볼 때와 종이로 출력해서 볼 때는 어쩌면 이토록 다른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민낯의 원고는 그저 민망하고 부끄러워 불태워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시 이런 글을 썼을까? 나 미쳤나?’
다음 날 아침 연애편지를 다시 읽어봐도 이 정도 기가 차진 않을 것이다. 지금 겨우겨우 읽어내는 이 글 뭉치들은 앞뒤전후 논리전개가 하나도 맞지 않고,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앞에 두고 너무나 과묵하고, 정사장면은 저 혼자 경박하게 신이 나있다.
고로 초고의 운명은 대개가 ‘전면적 수정’이다. 곰국 끓일 때 처음 우려낸 핏물처럼 그 질척한 첫 국물은 아낌없이 다 버려야 한다. 불순물을 없애고 새로 다시 끓여내야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세 발짝 쯤 떨어져서 내 원고를 냉정하게 바라보자.
포스트잇과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을 준비하자.
글 수정에 영향을 미칠 책이나 방송을 보지 않도록 하자.
감정에 영향을 줄 사람들도 당분간 만나지 않도록 하자.
운동을 하고 숙면을 취해 체력과 마음가짐을 일정하게 가다듬자.

종이상태로 하는 초고의 첫 수정, 바로 그 시점이 향후 이 책의 운명을 가늠할 가장 실질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다. 나는 초고를 다시 읽고 수정하면서 자주, 깊디 깊은 자학에 빠진다. 아주 어쩌다 가끔 나를 정신적으로 구제해 줄 자뻑의 몇 줄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천국 뒤의 지옥, 자유 뒤의 통제, 그리고 가장 도망치고 싶지만 절대 도망갈 수 없는 지점에 나는 지금 와 있다. 처음 마주하는 장벽은 어쩌면 이토록 높고 단단해 보이는지. 그래도 어떻게든 내 힘으로 뛰어넘어야만 한다. 두 번째 장편소설의 첫 수정을 시작하는 지금, 이제부터가 진짜 글쓰기의 시작이다.


글/임경선


책소개 :
1.<리추얼>메이슨 커리 저
2.<잘 쓰려고 하지마라>메러디스 매런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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