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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게 그렇다.
영화를 보는 당일의 몸 컨디션이나, 우울함의 정도,
동행의 유무 내지는 동행과의 신체적, 정신적 친밀도,
하다못해 선택한 극장의 안락함이나 극장좌석의 위치까지...
아주 세세한 부분들에 의해서 같은 영화라도
감상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영화가 시작하기전 손에 쥔 쥐포가 끈적거리며 불쾌하게 달라붙을 때부터 알아봤다.
과연,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 등 실험정신(?) 넘치는 초기작품 들과
남북문제의 날카로운 칼날을 어리버리한 휴머니즘으로 교묘히 감추어
분에 넘치는 흥행기록을 기록하였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은
과연 이번 영화를 통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걸까 ?
병원의사와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인 류(신하균 분)가 빈틈없이 화면을 채우는
갇혀진 구조의 영화의 첫장면부터
가슴속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 영화는 단절의 영화이다.
극중 캐릭터, 이야기 전개, 하물며 각 화면들의 미쟝센마져도 심하게 갇혀져 있다.
청각장애인인 류와 사회에 등을 돌린 비밀결사의 일원인 영미(배두나 분)라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역할설정 조차도
관객을 무한정 답답하게 하려는 감독의 계산된 배치물이다.
그러한 답답함으로 앞으로의 공포심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이 영화의 가장 큰 악덕은 보여주지 않을 걸 보여준다는 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장기암매매 조직의 일원의 머리를 거듭 내리치는
류의 호쾌한 액션이라던가
류가 자신이 죽인 장기암매매 조직 세 모자의 신장을 소금에 찍어먹었다는 깜찍한 설정,
영미에 귀에 탐욕스럽게 귀에 침을 묻히고, 전기고문으로 죽어가는 영미를 앞에 놓고
천역덕스럽게 짜장면을 먹는 살인에 길들여지는 동진(송강호 분)의 파격적인 내적변화,
동진이 류를 물속까지 끌고 가서 "넌 착하니까 내가 널 죽이는 걸 이해할꺼야"라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다가 느닷없이 돌고래처럼 날쎄게 물속으로 사라져
류의 아킬레스 건을 짤라내는 순박한 상상력...
게다가 격에 안맞게 영화 곳곳에서 피식~거리듯 흘러나오는 능청스런 유머의 의미는
차라리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잔혹한 기억들에서 생기는 공포감이라는 건 얼마나 유효한 것일까.
극장문을 나서면서
한편의 영화로 흥행감독에 오른 자신의 능력에 스스로 도취된 한 2류감독의 아둔함과
여러 매체를 통하여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던 겉멋만 든 평론가들 모두에게
복수심에 불타올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복수는 나의 것인가 보다.)
- 영화를 보고 머리를 잠시 스치운 생각들...
·<히치콕과의 대화>, 프랑수와 트뤼포
여기서 히치콕은 영화속의 공포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한 식당에 테러리스트들이 시한폭탄을 설치해놓은 장면에서 관객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반드시 폭탄이 터지고 난후 머리가 깨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피해자들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 저급한 모습을 화면에 담지 않더라도
여러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서 서서히 그리고 극한적으로 관객을 공포로 몰아갈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나라야마 부시코>, <우나기>등을 통하여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노감독의 필모그래피중에서
초기에 만든 걸작 중에 하나가 <복수는 나의 것>이다.
카메라는 별도의 개입없이 한 패륜아의 범죄행적들을 무덤덤하게 쫏아가기만 한다.
사회를 보는 쇼헤이 감독의 인류학적 접근은 더할 나위없이 흥미진진하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어느 곳에도 피한방울 튀지 않는다.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 존 맥노턴
밥먹고 똥싸는 것과 같이 평범한 일상처럼 살인을 묘사한 영화다.
예를 들자면 이런식이다. 연쇄살인범인 헨리가 친구의 집을 찾아가 친구와 친구의 여동생과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노닥거리는 씬에서 장면이 바뀌어
다음날 아침 두 개의 푸대자루를 등에 울러매고 헨리가 문을 나선다.
이 영화 역시 살인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한 씬도 없지만
내가 본 가장 당황스럽고 공포스러운 영화중 한편이다.
·<심판>, 카프카
카프카가 쓴 이 걸작은 오손 웰즈와 데이빗 휴 존스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졌다.
갑자기 이 소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마지막 장면이 심판의 그것과 심하게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심판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조셉 K와 같이
동진은 영미의 조직원들에-동진은 그들이 결코 누군이진 모르는- 의하여
살해를 당하게 된다.
살해당하는 장소가 큰 바위에서 자동차라는 것만 바뀌었을 뿐 설정등은 너무도 비슷하다.
만약 박찬욱이 이 책(영화)을 오마쥬해낸 것이라면,
<복수는 나의 것>안의 모든 살인들도 원죄에 의한 것이라는 강변인데...
제발 좀 웃기지 말라구...
쳇, 너무 비분강개해서 쓰다보니 내가 봐도 뭔말인지 모르겠네...
영화를 보는 당일의 몸 컨디션이나, 우울함의 정도,
동행의 유무 내지는 동행과의 신체적, 정신적 친밀도,
하다못해 선택한 극장의 안락함이나 극장좌석의 위치까지...
아주 세세한 부분들에 의해서 같은 영화라도
감상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영화가 시작하기전 손에 쥔 쥐포가 끈적거리며 불쾌하게 달라붙을 때부터 알아봤다.
과연,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 등 실험정신(?) 넘치는 초기작품 들과
남북문제의 날카로운 칼날을 어리버리한 휴머니즘으로 교묘히 감추어
분에 넘치는 흥행기록을 기록하였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은
과연 이번 영화를 통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걸까 ?
병원의사와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인 류(신하균 분)가 빈틈없이 화면을 채우는
갇혀진 구조의 영화의 첫장면부터
가슴속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 영화는 단절의 영화이다.
극중 캐릭터, 이야기 전개, 하물며 각 화면들의 미쟝센마져도 심하게 갇혀져 있다.
청각장애인인 류와 사회에 등을 돌린 비밀결사의 일원인 영미(배두나 분)라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역할설정 조차도
관객을 무한정 답답하게 하려는 감독의 계산된 배치물이다.
그러한 답답함으로 앞으로의 공포심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이 영화의 가장 큰 악덕은 보여주지 않을 걸 보여준다는 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장기암매매 조직의 일원의 머리를 거듭 내리치는
류의 호쾌한 액션이라던가
류가 자신이 죽인 장기암매매 조직 세 모자의 신장을 소금에 찍어먹었다는 깜찍한 설정,
영미에 귀에 탐욕스럽게 귀에 침을 묻히고, 전기고문으로 죽어가는 영미를 앞에 놓고
천역덕스럽게 짜장면을 먹는 살인에 길들여지는 동진(송강호 분)의 파격적인 내적변화,
동진이 류를 물속까지 끌고 가서 "넌 착하니까 내가 널 죽이는 걸 이해할꺼야"라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다가 느닷없이 돌고래처럼 날쎄게 물속으로 사라져
류의 아킬레스 건을 짤라내는 순박한 상상력...
게다가 격에 안맞게 영화 곳곳에서 피식~거리듯 흘러나오는 능청스런 유머의 의미는
차라리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잔혹한 기억들에서 생기는 공포감이라는 건 얼마나 유효한 것일까.
극장문을 나서면서
한편의 영화로 흥행감독에 오른 자신의 능력에 스스로 도취된 한 2류감독의 아둔함과
여러 매체를 통하여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던 겉멋만 든 평론가들 모두에게
복수심에 불타올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복수는 나의 것인가 보다.)
- 영화를 보고 머리를 잠시 스치운 생각들...
·<히치콕과의 대화>, 프랑수와 트뤼포
여기서 히치콕은 영화속의 공포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한 식당에 테러리스트들이 시한폭탄을 설치해놓은 장면에서 관객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반드시 폭탄이 터지고 난후 머리가 깨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피해자들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 저급한 모습을 화면에 담지 않더라도
여러 영화적 장치들을 통해서 서서히 그리고 극한적으로 관객을 공포로 몰아갈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나라야마 부시코>, <우나기>등을 통하여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노감독의 필모그래피중에서
초기에 만든 걸작 중에 하나가 <복수는 나의 것>이다.
카메라는 별도의 개입없이 한 패륜아의 범죄행적들을 무덤덤하게 쫏아가기만 한다.
사회를 보는 쇼헤이 감독의 인류학적 접근은 더할 나위없이 흥미진진하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어느 곳에도 피한방울 튀지 않는다.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 존 맥노턴
밥먹고 똥싸는 것과 같이 평범한 일상처럼 살인을 묘사한 영화다.
예를 들자면 이런식이다. 연쇄살인범인 헨리가 친구의 집을 찾아가 친구와 친구의 여동생과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노닥거리는 씬에서 장면이 바뀌어
다음날 아침 두 개의 푸대자루를 등에 울러매고 헨리가 문을 나선다.
이 영화 역시 살인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한 씬도 없지만
내가 본 가장 당황스럽고 공포스러운 영화중 한편이다.
·<심판>, 카프카
카프카가 쓴 이 걸작은 오손 웰즈와 데이빗 휴 존스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졌다.
갑자기 이 소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마지막 장면이 심판의 그것과 심하게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심판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조셉 K와 같이
동진은 영미의 조직원들에-동진은 그들이 결코 누군이진 모르는- 의하여
살해를 당하게 된다.
살해당하는 장소가 큰 바위에서 자동차라는 것만 바뀌었을 뿐 설정등은 너무도 비슷하다.
만약 박찬욱이 이 책(영화)을 오마쥬해낸 것이라면,
<복수는 나의 것>안의 모든 살인들도 원죄에 의한 것이라는 강변인데...
제발 좀 웃기지 말라구...
쳇, 너무 비분강개해서 쓰다보니 내가 봐도 뭔말인지 모르겠네...
우욱...영화 줄거리만 들어도 쏠리는 것 같애...-_-;;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것도 보여주는 건가요?
저도 공포 영화, 소설 다 좋아하지만 솔직히 이제껏 맘에 꼭 드는 건 본 적이 없어요. jealousyy님이 적어두신 걸로 봐야겠네요...기대된다~~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것도 보여주는 건가요?
저도 공포 영화, 소설 다 좋아하지만 솔직히 이제껏 맘에 꼭 드는 건 본 적이 없어요. jealousyy님이 적어두신 걸로 봐야겠네요...기대된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엄습해오는건
공포를 주기 위함이고
그 실체를 까 바라는채 날뛰는건
불안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공포는 그 순간이 지나면 잊혀지지만
불안은 내내 사람을 괴롭히지요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서 별 신경은 안 쓰지만.
어차피 보는 관점의 차이지 수준의 차이는
아니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