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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에 [나라는 여자]를 내고 근 석 달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여태까지 쓴 책 중 가장 민낯을 드러냈던 책이라 심적으로 추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후, 지금처럼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 즈음부터 "자, 이번에는 장편소설을 써보겠다"며 늘 그래왔듯 말부터 뱉어놓고 대책없이 수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아이를 8시 반까지 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그 길로 곧장 글 쓰러 주 3일은 집에서 꽤 먼 상수동 '커피발전소'로, 주 이틀은 집앞 카페로 노트북 가방을 들고 출근도장을 찍었습니다. 하루는 참 덧없이 훌쩍 지나가버립니다. 4시엔 자리에서 일어나 돌봄교실에서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이를 데리러가야만 했습니다. 체력유지를 위해 하루 걸러 운동도 꾸준히 했지만 그래도 아이를 데리러 갈 때면 노트북 가방은 아침과는 달리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다리를 뻣뻣했고 신경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정신과 약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기억해줘]의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작년 가을부터 올 여름까지 이 소설을 썼던 시간들에 대해서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처럼 기억 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은 '내가 언제 이런 걸 썼지?'라며 불가사의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잔상은 남습니다. 쓰기 전에 염두에 두었던 플롯은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까 전혀 다른 플롯으로 저는 쓰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쓰면서 끊임없이 캐릭터와 스토리전개가 바뀌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그 구체적인 변화과정은 물론 기억이 안나는데, 아니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어찌어찌해서 초고를 썼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부적합판정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습니다. 중간조율을 하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역시 가차없는 비판을 들을 때는 속상했습니다. 2고를 썼고, 그 후 3고와 4고를 썼습니다. 원고수정을 거듭할 때마다 저는 굳이 돈을 써서 kinkos 홍대점에서 빈티지 느낌의 갈색종이로 커버를 둘러 종이책으로 제본을 해놓았습니다. 기념으로 남겨두기 위해 그런 허세스러운 짓을 한 것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형식적인 매듭을 짓지 않으면, 혹은 그런 식으로 손으로 매만질 수 있는 형태로 남겨놓지 않으면, 부족하고 서툴더라도 그 당시 그 수준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 묵살당하는 것 같아 제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글이라는 건 컴퓨터로 삭제하면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불쌍한 아이들이잖아요. 아마도 대다수 그런 식으로 없어질 운명에 처한 글들이기에 보듬어주지 않으면 다음 수정을 위해 다시 힘을 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 네 권의 두툼한 종이뭉치들은 지금 책상 옆 책장 맨 위 구석에 끼워놓고 한동안 꺼내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얘들아, 거기서 손들고 당분간 반성하고 있으렴.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엄마와 연애할 때]와 [나라는 여자]를 편집한 배윤영 팀장이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기억해줘]를 같이 만들어주었습니다. 한 편집자와 매년 한 권씩 같이 책을 내는 일은 국내 환경에서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척 하면 척 하는 사이입니다. 이젠 아무 말 없어도 대략 육감과 눈치로 상황파악이 됩니다. 3고를 보내고 나서였던가, 뭐 이번에는 그래도 대략 통과되겠지 싶었는데, 딸의 방을 청소하던 중에 평소 울리지도 않는 전화벨이 울렸고 저는 직감적으로 '아, 이번 원고도 미흡했구나'라고 알아차렸습니다. 제 육감은 맞아떨어졌고, 청소 밀대를 잡던 오른 손을 멈추고 딸의 어린이침대에 누워 수화기너머의 상대방 부담스럽게시리 한숨을 얼마나 깊게 내쉬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배윤영팀장에게 어린아이처럼 짜증 섞어 하소연을 늘어놓았습니다. 다 내가 못 써서 그런 건데, 그때를 생각하면 낯뜨거워집니다.

단편소설과는 달리 장편소설은 아무리 단순한 이야기라도 쓰는 동안 몇 번이나 크고 막막한 장벽이 가로막는가 하면, 마치 퍼즐을 푸는 것처럼 머리를 쥐어짜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며칠을 생각해도 돌파구를 못 찾고 밤새 악몽으로 끙끙 앓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면 어느새 스르륵 그 문제가 절로 풀린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날은 정말 온종일 행복했습니다. 

소설을 한 권씩 쓸 때마다 저자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글을 여기저기서 읽었습니다. 제 경우 다른 변화들은 아직 모르겠고, 현재 상황에선 체감할 수 있는 확실한 변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더 이상 등단문제를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미지 앤 노블]이라는 잡지에 '어떤 미등단작가의 고백'이라는 글을 썼는데 '한국에서 글쟁이를 하려면 꼭 정식으로 등단하고 문단에 들어가야 인정을 받는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며 '에라 모르겠다. 난 나대로의 길을 가련다'식으로 조금 센 척을 한 바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의지로 '난 등단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겠다'고 공언했건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의지'라는 건 여전히 조금은 미련이 남아있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작품 완성도의 여부를 떠나 이번에 탈고하고 나니 예전의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등단을 해야하나'라는 고민은 제 안에서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내겐 그리 많은 시간이 있지도 않고, 어차피 내 글은 심사위원들의 취향이나 눈높이에는 안 맞거나 부족할 것이고, 무엇보다 제게 더 이상 그러한 인정욕구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한 때는, 아니 한동안 마음을 복잡하게 괴롭혔던 문제가 어떠한 계기로 더 이상 자연스럽게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죠. 곰곰 생각해보건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체념하게 된 데는 여기에는 이름을 못 밝히지만,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닮고 싶은 몇 분이 제게 해준 비장미 하나 없는 산뜻한 인정과 격려 덕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중요하거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존중해주면 그것만으로도 꽤 큰 결핍이 절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기억해줘]가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정의내리지 못하는 소설따위, 마케팅적으로 불리할 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제약 하나 없이, 저 깊은 곳에 숨겨둔 여러가지 감정들에 대해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들을 이 책에 한껏 써내려갔습니다. 저자로서 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결함과 결핍이 있는 등장인물들의 잔인하면서도 서툰 부분과 그들의 균열, 모순, 불완전함을 사랑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관대해짐으로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책은 지금 공장에서 한창 만들어서 배본이 진행되고 있는 중일 겁니다. 전 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저, 원래 성격 엄청 급한데 전혀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며칠 후 대부분의 서점에서 볼 수 있는 그 날까지 조금만 더 저와 담당 편집자만의 아이로 뱃속에 품고 있는 이 기분도 썩 나쁘지 않습니다. 머지 않아 멀리 홀로 떠나보낼 아이이니 말입니다. 그 아이가 제대로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정확히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어미로서 기원할 뿐입니다. 


2014년 가을, [기억해줘]출간을 앞둔, 

임경선 올림.


  


 

 


의미없다

2014.10.11 22:15:37

다음 주에 읽어볼 수 있겠네요. 

나이 먹어 그런지 설레는 일 줄어드는 이 시기에 설레는 일 한 가지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어느 지점마다의 마음을 여기에 공유해주시는 것도 감사해요.

홈페이지 새 대문 그림, 

"집안의 장녀이름을 딴 가게라고 치고 앞으로도 무심하게 예뻐해줄 생각이다"라는 말씀도요 :)

molamola

2014.10.13 11:10:42

응원합니다. 홈페이지 대문 보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웃구사세

2014.10.13 17:32:56

토닥토닥. 정말 수고 많았어요.

-오랜만에 로그인한 웃구사세 드림-

대갈장군 정!

2014.10.13 21:14:55

애 끓이고 맘 끓인 만큼. 좋은 놈일거에요.
재미나게 읽을게요.

deep breathing

2014.10.14 05:36:42

"비밀글 입니다."

:

릴라

2014.10.14 13:32:27

이런 소감, 글로 남겨주셔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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