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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콜릿은 녹여서 굳히면 끝이야.

  물론 그 ‘녹이고’ ‘굳히는’ 게 만만찮은 일은 아니죠. 그렇게 쉬우면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이 왜 있게요. 하지만 그냥 ‘수제입니다’ 하고 생색내서 선물할 용도라면 꽤 간단해요. 요즘에는 만들기 키트도 정말 잘 나와서, 설명서에서 하라는 대로 녹이고 붙이고 굳히면 꽤 근사한 초콜릿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이렇게 쉬운 걸, 그때는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중학교 이학년 때였어요. 하루 이틀 뒤면 화이트 데이였죠.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그렇게 흘려 보냈겠지만, 그때 전 같은 반 여자애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주 귀여운 목소리의 여자애. 얼굴에는 사춘기 여자애답게 두드러기가 한두개 났지만 괜찮았답니다. 욕심많은 성격의 여성을 지금도 좋아하는데 그때도 그랬어요. 아무튼 저 혼자하는 짝사랑 이었습니다. 근데 왜 사탕이 아니냐구요? 그냥 제가 사탕보다 초콜렛을 좋아해서요.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화이트 데이가 오니 없던 용기가 생겼어요. 친구를 불러서 우리 집 부엌에서 ‘중탕’이라는 걸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손이 참 둔하거든요. 초등학교 실습시간에 팬케이크도 홀랑 다 태워먹은 무서운 재능이 이 순간에도 나타나더군요. 중탕 그릇에 있던 물이 초콜릿 그릇에 다 들어가고, 불을 너무 세게 해서 기름이 분리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사온 가나초콜릿을 다 써서 나가서 사오고, 또 사오고. 어떻게든 보잘것없는 초콜릿 여덟 개를 만들었어요. 주방은 난리가 났는데 때마침 엄마가 딱 들어오더군요. 가스렌지에 늘어붙은 초콜릿과, 더럽기 짝이 없는 아들내미를 보더니 한마디. 

  “그거 누구 줄려고?”
  “……있어!”

  평소 같으면 소리 빽 지르고 한숨 팍 내쉬고 걸레를 북북 문질렀을 엄마가, ‘초콜릿’을 보고 뭔가 짚이는 게 있던지 아무 말도 안하더군요. 이걸 어디다 넣어야할지 고민하는데, 엄마가 일본 전통 라멘집 느낌나는 나무통 하나를 주더라고요. 그래도 예쁜 포장지에 넣어서 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사실 이정도로 잔소리 안 들은 것도 행운이라 일단 거기에 넣긴 넣었어요. 이런 통에 넣어야 직접 만든 느낌이 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수긍이 가기도 했고요.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서 그걸 꺼내서 가방에 넣을 때는 제법 가슴이 떨렸어요.

  남녀공학 중학교라 그랬는지 화이트 데이에 학교가 아주 난리였어요. 어쨌든 오전수업이 지나가고 점심시간에 애써 용기를 내어 말했어요. 물론 혼자 있을 때였죠. 청소 끝나고 5시에 주차장 후문쪽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전 그날 청소당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난다음 마냥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되었죠.

  그 여자애가 오는데 심장이 막 뛰어요. 멍충이처럼 손도 발발 떨리고요. 애써 꼭 쥐고 한 걸음 앞으로 가려는데, 돌에 걸려 몸이 앞으로 확 넘어졌어요. 통에 담겼던 초콜릿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져 버렸어요. 하필 거기는 화단 쪽이어서 초콜릿에 모래까지 잔뜩 묻었죠.




뒷이야기는 좀 길어 여기에서 끊고 에피소드 2편에서 계속 쓰겠습니다.



만만새

2019.03.26 15:29:06

ㅋㅋ2편 빨리 올려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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