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FILE
  • COLUMNSnew
  • FREETALK
  • BOOKS
  • SCHOOL
  • 회원가입
  •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FREETALK
글 수 54,556

카페는 도서관이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는 초입에 있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그 카페 앞을 적어도 두 번은 지나칠 수밖에 없다.

보통은 도서관에 먼저 갔다가 나오는 길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시켜 놓고

새로 빌려온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주인장과 수다를 떨곤 한다.

 

주인장이 휴가를 가서 아르바이트생이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만 빼면

그날도 그런 보통 날들 중 하루였다.

책을 읽다 지루해져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당신은 리어카를 끌고 카페 쪽으로 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흰 머리카락이 절반쯤 섞여 있는 짧은 커트 머리였으니

할머니 보다는 중년 여성이라는 표현이 당신에게는 적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씻은 지 며칠은 된 것 같은 손발과 얼굴,

촌스런 원색 바지에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받쳐 입고 있어서

당신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할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행색이었다.

 

폐지가 수북하게 쌓인 리어카를 카페 앞에 세우더니

당신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점원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돈 없어도 들어와도 되지요?

 

테이블이 몇 개 없는 작은 카페였으므로 모두가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고개를 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러 못 들은 척했던 나 같은 사람도 개중에는 있었을지 모른다.

 

점원은 네, 하고 대답했고 당신은 이어서 차분히 용건을 말했다.

밖에 쌓여 있는 폐지, 가져가도 되는지 물어보려고요.

아, 저희 사장님이 지금 안 계셔서 잘 모르겠네요. 저도 잘 몰라서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당신에게 시원한 과일 주스 한 잔 대접하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메뉴판을 보며 토마토 주스가 좋을지 오렌지 주스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커피는 당신에게 대접할 음료로 애초에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분명 당신은 커피를 마실 줄 모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생각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당신은 용건을 마치고 카페에서 나가기 위해 문쪽으로 향해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고 당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당신은 카페에 들어온 순간부터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쳤던 순간 내게 가만히 목례를 했고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황하는 내게 당황했다.

이곳은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도 없는 불쌍한 폐지 줍는 할머니가 들어올 곳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건방지게 대체 누가 누구의 자존심을 지킨다는 말인가.

당신은 누군가에게 자존심을 보호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 무엇도 부수지 못할 자존감이 당신을 지키고 있으므로.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받고 많은 눈물을 흘렸겠지만

그 안에서 당신만이 발견한 반짝이는 재료들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견고한 자존감이라는 성을 쌓았을 것이다.

 

눈이 밝은 당신은 살아가기 위해 일찍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존감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공손한 말투로 양해를 구하고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있던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존감을 키운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세상에 섞이는 일.

생수 한 병과 약간의 간식만 넣은 배낭을 메고 가볍게 숲길을 걷는 것과 같은 일.

 

날씨는 쾌청하고 숲길은 발에 채이는 돌부리 하나 없이 걷기 좋게 뻗어 있는데

나는 아직도 나를 짊어지고 걷느라 숨이 차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나를 더 내려놓고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번 더 당신을 만나면 맛있는 커피 한 잔 같이 하고 싶다.

아메리카노도 좋고 라떼도 좋고, 혹시 카페인에 민감해 커피를 싫어한다면 과일주스도 좋겠지.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어떤 음료를 좋아하는지 어쩌면 미리 물어 보았어도 좋았을 법 했다.

 

profile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엮인글 :
http://catwoman.pe.kr/xe/index.php?document_srl=1915202&act=trackback&key=67f


카르준케

2012.08.22 21:54:21

추천
3

"자신감이 없으니 불안하고 자존감이 낮으니 오해한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저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을때 음료한잔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갑자기 든 생각이 이것은 나의 호의인가 아니면 동정인가하는 고민에 빠져서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죠.

호의라면 나와 그 분을 동등하게 본것이고, 동정이라면 그분을 낮게 보고 베푸는 것이라는 딜레마

하지만 호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동정으로 비춰질까 하는 나의 (자신감에 의한) 불안과 (자존심에 의한) 오해가 생겨버렸어요.

유은호

2012.08.22 22:46:17

담요님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저 역시 저 자신을 짊어지고 있느라 여유가 하나도 없어 주변을 돌아볼 마음이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백발광녀

2012.08.22 23:44:05

저도 저를 더 진솔하게 들여다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담요님. :)

곰마눌

2012.08.23 01:20:10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읽었어요!!:)

아직미완성

2012.08.23 08:55:55

좋은글잘읽었습니다!! 요새 들어서 내자신밖에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아직도 많이 성장해 가야 되는듯 싶습니다.

와삽

2012.08.23 12:40:08

추천
1

망설여질 때는 그냥 하는쪽을 택하자고 결심한 이년전 어느 여름이 생각나네요. 저 사는 곳 앞에 에스칼레이터 공사가 한창이었고, 전 찜질방을 가려고 털레털레 걷다가 벤치위와 바닥에서 덥고 지친듯이 아무렇게나 쉬고 계신 아저씨 서너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찜질방 입구 바로 앞이고 표 끊고 옷장여는 순간까지 고민했었습니다. 집 냉장고에 참외가 있는데 드릴까'

와삽

2012.08.23 12:47:19

폰이라 어설프네요 역시; 암튼 고민하다가 옷장안에 물품 놓고 찜질방엔 잠시 나갔다오겠다고 하고 집에 가서 참외를 네개 깎아서 아저씨들에게 더운데 이거 드세요 하고 빨리 드리고 온 기억이 있습니다. 흠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마음생겼을 때 그 순간에 그냥 지나치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담요님 글과 마음이 너무 좋아서 급하게 저도 남겨보네요^^

세모

2012.08.23 15:03:07

저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마음으로 망설인 적이 몇 차례 있는데, 와삽님처럼 그냥 행동할걸 그랬어요. 행동한 와삽님의 경험이 제게 용기를 줬습니다. ㅎㅎ 감사해요.

헤르다

2012.08.23 16:14:57

새벽녘 부쩍 선선하다했더니 요술담요의 계절이 오고 있어요 ;)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만 하다 결국은 때를 놓치고, 어쩔 땐 그 때를 놓침에 안도하는 나를 보며

정말 못났다 생각하고. 사람이 치사해지지 말아야지. 어째 그런 마음을 먹나. 

애초에 고민하는 척이나 하지 말지. 싶어요. 동정이 뭐가 나쁜가 싶다가도. 

내가 뭔데. 저렇게 열심히 사는 분들을 안타까워 하는 걸까. 자괴감 들고. 에이 되게 횡설수설하네요.

요새 구구절절 병 걸려서 그래요. 이번 글은 어른담요같아요. 음 그래요. 꼭 같이 커피 한 잔 하게되면

그러면 되게 좋을 것 같아요.

surfer

2012.08.23 23:15:17

저도 껴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sort
공지 에세이 <교토에 다녀왔습니다.>가 출간되었습니다! file [1] 캣우먼 2017-08-31 606  
공지 에세이<자유로울 것>이 출간되었습니다- file [6] 캣우먼 2017-01-23 30291 3
공지 여행서 <임경선의 도쿄>가 출간되었습니다!! file [12] 캣우먼 2016-04-07 67921 5
공지 장편소설 <나의 남자>가 3월 1일에 출간되었습니다. file [12] 캣우먼 2016-02-29 72874 4
공지 에세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이 10월20일에 출간되었습니다 : ) file [5] 캣우먼 2015-10-19 90941 2
공지 산문 [태도에 관하여]가 3월30일 출간됩니다. file [15] 캣우먼 2015-03-27 112001 2
공지 장편소설 [기억해줘]가 출간되었습니다 : ) file [11] 캣우먼 2014-10-14 204312 2
공지 자주 묻는 질문 / 문의하기 관리자 2013-08-14 341085 2
공지 산문집 [나라는 여자]가 나왔습니다. file [40] 캣우먼 2013-04-16 366356 10
54555 What a coincidence - 인연과 우연. [18] 롤링스톤즈 2012-10-08 9802 26
54554 연애 중 괴로우신 분들을 위한 베리베리 스몰팁. [15] 3호선 2012-05-21 9825 24
54553 은근히 눈이 높은 사람들 [26] 앙드레몽 2012-04-02 10210 22
54552 앞 페이지의 영어 공부 어떻게 하냐는 글을 읽고... [17] DonnDonn 2012-03-19 9678 20
54551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싱글 여성분께 드린 쪽지 [60] plastic 2014-05-20 10236 19
54550 결혼 - '그럼에도 불구하고' [32] 갈매나무 2012-12-13 9517 17
54549 연애 잘 하는 남자(엄청 깁니다 : 스압주의) [92] saki 2012-04-02 12538 17
54548 안타깝고,무섭네요. 해밀 2014-05-13 4021 14
54547 잠수부와 나비 (부제: 연락없는 남친의 속마음 및 대처법) [2] 기버 2012-06-04 11402 14
54546 화장품과 피부관리에 대한 썰. 수정완료. [44] askdeer 2012-01-03 11583 14
54545 학교 도서관 정문 앞에 대자보를 붙이고 오니 [62] 원더걸 2013-12-17 6916 13
54544 삶이 만만치 않다고 느껴질 때 읽어봄직한 글... [6] 바둑이 2012-06-14 8038 12
54543 <캣우먼>글 임의로 삭제했습니다. [21] 캣우먼 2012-06-12 8101 12
54542 공창제가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 [13] 눈사람 2012-01-17 16961 12
54541 과외 학생에게 고백받은 후기입니다. [120] 부대찌개 2014-04-30 11939 11
54540 봉봉2님께 [16] 애플소스 2014-03-04 5218 11
54539 용기냈어요. [11] 누누 2013-10-23 5859 11
54538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펌) [4] 제비꽃 2012-12-21 6992 11
»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10] 담요 2012-08-22 6728 11
54536 '혼자'를 누리는 일 [14] 러브어페어 2014-04-29 7734 10
54535 아직 인연이 안 나타나서 그래요 [18] 앙드레몽 2012-10-08 10015 10
54534 [펌] 나이 들어 늦게 깨닫게 되는 우리 삶의 진실 [6] plastic 2012-06-15 6387 10
54533 (수정)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50] sunflower 2012-05-27 5839 10
54532 loveable한, 말랑말랑 가벼운 상태 만들기 (퍼온글) [12] 녹차쉬폰 2011-05-05 30465 10
54531 마이바흐 [23] 모험도감 2017-03-02 758 10
54530 "20년 지나도 뜨거운 사랑 있다." [38] Adelaide 2015-02-05 5304 9
54529 '생각으로' 라는 닉네임이 되게 익숙했는데 역시나는 역시나네요 [37] 다아시 2017-03-02 880 9
54528 콘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12] 헤르다 2014-05-19 5848 9
54527 어이가 없네요. [29] 석류알 2013-12-18 6004 9
54526 알고 있으면 유용한 사이트~ [14] 너는 완성이었어 2012-10-25 7382 9
54525 이런 연애 [27] 갈매나무 2012-06-15 7041 9
54524 <캣우먼>편지 고맙습니다. [17] 캣우먼 2012-05-15 5340 9
54523 허쥴선생 노동력 절감형 부엌 [12] 쥴. 2012-05-16 4455 9
54522 젊은 보수 [116] 너는 완성이었어 2012-12-20 6539 9